글쓴이 : 보더콜리
빈 노트 한가운데 ‘잊지 못할 여행지’를 적고, 마인드맵을 그리기 시작했다. 뻗어나온 가지는 하나 같이 부정의 연속이었다. 엄마와 아빠, 친구와 함께 간 여행에서 택시 기사가 20만 동을 듣고 200만 동을 준 내게 하나도 거슬러 주지 않고 간 일. 호주에서 나와 내 친구(둘 다 여자다)가 밤새 에어비앤비가 알고 보니 주인과 같이 사는 집에 딸린 미닫이문으로 여닫는 베란다룸이었던 일. 전 애인과 첫 비행기를 탔던 제주 여행에서 관광 안내원 분도 평생 보지 못한 폭우를 오름을 오르내리며 속옷이 다 젖도록 맞은 일. 마인드맵을 보자니 떠오른 말이 있다. “집 나가면 개고생이다.”
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,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. 매번 여행지에서 호되게 당해도 또 여행을 간다. 글을 쓰려고 그린 마인드맵에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. 아무리 가지를 뻗어도 당최 좋은 추억이 안 나오는데 또 여행이 가고 싶냐며, 수많은 글자들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. 그러게,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정작 좋은 게 하나 없는데 왜 또 가려고 할까? 과거의 내가 잘못한 걸까, 미래의 내가 또 여행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까?
치열한 물음과 답의 끝에 결정했다.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. 내가 기억하는 건 모두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. 사기, 실랑이, 폭우, 그 어느 것도 계획할 리가 없는 일이다. 하지만 이걸 기억하는 건 내 다음을 위해서다. 다음엔 숫자는 더 자세히 듣고 모르면 계속 물어야지. 다음엔 사진 말고도 후기나 기록을 더 찾아봐야지. 자연 속으로 들어갈 때는 날씨가 최악일 수 있다는 가정을 염두해야지. 이 모든 다음을 위한 기약은 사진첩에 없다. 당장 그 일에서 빠져나오느라 혼이 속 빠져있어서, 막상 뭐라도 남겨둘 걸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일이 끝난 뒤다.
사진은 예쁜 순간만 안다.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올린 사진은 해피엔딩만 보여준다. 사진첩에 정리되지 않은 채 쌓인 사진들도 조금 덜 마음에 들 뿐, 그래도 행복한 순간들이다. 하지만 삶은 행복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. 우여곡절과 시행착오가 여럿 모여야 하나의 행복한 순간이 나온다.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. 누가 여행 간 사진을 보더라도 너무 배 아파하지 않을 힘을 얻은 기분이다. 그도 나도 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고, 고생 끝에 낙이 오는,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니까.
8세부터 20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. 24시간 안에 하고 싶은 걸 다 하겠다는 야망 때문이다. 인터넷 강의에서 시작한 2배속은 OTT로 현재 진행 중이다. 선호가 쉽게 휘발되는 사람이다. 미지에서 생경한 경험을 찾아 다닌다. 모든 모험이 끝나면, 비로소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.